엠타트업 교육생 후기 게시판

[심화컨설팅 18기 후기] 아무에게도 들려준 적 없던 기가막힌 이야기, 맞습니다 제가 m군님 수업시간에 앞에 뛰쳐나간 그 놈입니다. 그리고 [m군리스트] 출연

작성자
엠타트업
작성일
2022-10-11 20:16
조회
1228




아직 아무에게도 꺼낸 적이 없는 나의 이야기.

이렇게 글로 적게 될 거라고 한 번도 생각 해 본적이 없다.

그러나,

엠타트업에서 내 인생을 바꿨기에 이런 글을 쓸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첫 번째 변곡점

내 인생에는 3번의 커다란 변곡점이 있었다.

그 첫번째는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석아 놀라지 말그레이~"

"..............."

"너그 아부지 다치셔서 병원 가셨어!"

그땐 너무 정신이 없었다. 병원을 어떻게 갔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병원에 도착하니 응급실 한 켠에 아버지가 눈을 감은채 누워 계셨다. 머리에 미이라처럼 붕대를 칭칭 감고.

명절에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누나도 강제 호출되어 달려와 있었다.

당시 평화롭게만 살아온 내겐,

고작 15살 밖에 안 됐던 내겐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는 한 동네 이웃의 부탁으로 호두를 따다가 나무에서 떨어지셨다고 했다. 그도 그럴것이 아버지는 인정이 많으셔서 해마다 온 동네 호두며 감나무들을 다 따고 다니셨다.

머리 한 쪽의 뼈를 들어냈어야하는 대수술.

학교를 마치자 마자 달려가 하룻밤을 꼬박 샌 것 같다. 다행히 무사히 수술이 끝났고, 아버지는 천천히 호전되시더니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오셨다. 비록 한 쪽 머리에 주먹크기만한 두개골이 없는 상태로 평생을 사셔야 했지만.

그때 뇌병변장애라는 걸 처음 알았다. 다른 데는 멀쩡하신데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채로 사셨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고는 시작에 불과했다.

"어... 어... 어.............."

'쾅!'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던 버스가 과속을 했는지 그만 자전거로 하교 중이던 아이를 치고 말았다. 자전거는 불품없이 찌그러졌고, 아이는 못해도 10미터는 넘어 보이는 먼 발치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 아이가 바로 나다.

나는 병원에 두 달 정도 입원해 있었다. 혼수상태에 빠졌던 아이는 며칠만에 깨어났다. 그런데 완전 다른 인격이 내 안에 들어와 있었다.

옆 침대 환자한테 다가가 장난 치기도 하고, 아주 쾌활했으며 거침이 없었다. 말도 무척 잘해 병원의 많은 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이는 내가 아니었다. 나의 인격은 내가 퇴원하기 이틀 전에 돌아왔다.

어느 순간이었다.

아주 긴 잠에서 깨듯 천천히 '나'라는 존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구름위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어 이건 뭐지?"

대여섯걸음 정도의 거리 저 밑에 내가 누워있었다.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긴 병실 침대라는 것을,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플러쉬 100만개를 터트려놓은 듯한 빛 속에 내가 누워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눈부신 섬광이 나를 휘감았다. 그 순간 아프진 않았지만 온 몸을 바늘로 찌르는 듯 몸 여기저기 감각이 깨어났다.

임사체험!

그 이후 눈을 떴을 때 주변 사물과 사람의 실루엣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분명해져갔다. 처음 눈을 마주친 건 누나였다.

'부산에 있어야 될 누나가 왜?'

누나는 내 옆에서 반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 여기 어디야? 내가 왜 여기 있어?"

누나는 한 2초정도 아무 말이 없었다.

"기억 안나니?"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실 난 '그 때' 깨어난 게 아니었다. 거의 한 달 전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는 났지만, 완전 다른 사람으로 살았다.

나와는 다른 말투, 다른 행동, 다른 성격.

내 이름과 내 기억을 공유했던 다른 인격.

그 상황에 대해 의사선생님도 상투적인 답변만 내 놓을 뿐 뚜렷한 사유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영원히 그 한달 간의 기억은 내 머리속에서 사라졌다.

내 이름과 기억을 가지고 나처럼 살았던 그 아이가 누구였는지 아직도 모른다.

물론 나는 무사히 퇴원헀다. 그렇게 우리집에 두 번째 시련이 훍고 지나갔다. 그게 아버지가 퇴원하시고 한 달 여만에 일어난 사고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엄마'라는 존재가 가정의 중심에 있으니 큰 시련이 지나가도 버틸 수 있었다. 다시 학교에 가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석아~ 빨리 나와 보그레이~"

얼굴이 하얗게 사색 된 친척 할머니가 황급히 우리집을 뛰쳐 들어오시며 나를 불렀다.

갑자기 손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또... 뭔가 일이 일어났구나!'

할머니 뒤를 따라 황급히 뛰쳐나간 내 눈앞에는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세상에 전부 같았던 엄마가 2차선 아스팔트 중간에 널부러진 인형처럼 누워 계셨다. 엄마로 부터 쏟아져 나온 검붉은 액체가 도로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저 먼발치에 나 뒹구는 오토바이 한 대.

트라우마!

그때 처음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됐다.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엠뷸런스가 와서 엄마를 싣고 갈때까지 그 광경을 그대로 지켜봐야만 했다.

그 사고도 불과 내가 퇴원하고 두 어 달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엄마는 대수술을 하셔야 했다.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그리고 서울로. 그러나 엄마는 온전히 돌아오시지 못했다. 5살 아이가 되어 4년을 병석에 누워만 계시다 돌아가셨다.

그 날이 수능을 치른 얼마 뒤였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아들 수능 잘 치를 수 있게 기다리신 것 같았다. 그 날 하늘에선 첫 눈이 내렸다.

엄마는 내가 고3때 돌아가셨지만,

내 기억에 남아있는 '엄마'라는 존재는 열 다섯살이 끝이다.

엄마는 뇌를 크게 다치셔서 자식들이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밥줘~"

"물줘~"

고작 표현하시는 말이라 곤 이 두마디가 전부였다. 이따금씩 정신이 돌아와 이름은 기억하셧지만 매일 다섯 살 아이같은 엄마와 마주해야 했다.

이제 30년이나 된 일이라 아무렇지 않게 글에 담을 수 있지만, 엄마 아버지를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먹먹해진다.

제일 힘든 건 엄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해 본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돌아가셨을때 차갑게 식어버린 이마에 입을 맞추며 목놓아 '사랑한다'고 말 한 게 전부였다.

이 글을 보시는 분이라면 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길 바란다.

이젠 세월이 3바퀴나 지났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그런 일을 겪고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누나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나들이 엄마 아버지 역할을 대신 해 줬고 나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엄마의 사고 이후로 정든 고향을 떠나 누나들이 살고 있는 부산으로 향했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뒤에 엄청난 삶의 변화. 향수병에 젖어 새로운 곳에 적응을 못해 1년 정도는 방황을 했었다. 고향친구들을 만나기위해 가출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온전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던건 모두 누나 덕분이다. 그렇게 방황을 하다 돌아가면 늘 누나는 말없이, 따듯하게 안아줬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어떻게 표현해야될지 모르겠다. 사실 난 너무 큰 심적 변화가 그때 있었다.

15살 밖에 안되었지만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생각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유체이탈을 했을 때 느낌이 한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사고 한 번으로 '자아'를 잃어버린 엄마.

'죽음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아마 그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삶의 중요한 이치를 알아채기 시작 한 것은.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고, 모든 건 다 더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한 변곡점이라는 것을.'

그 때문이었을까?

그런 생각들 때문에 또래와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 좋게 말하면 관여도 차이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울림이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보이지 않는 나침반으로 작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덕분에 평범하지 않은 생각으로 사회생활을 했고, 정형화된 사회생활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엠군님을 만나고 관여도라는 말을 알게 되었는데 뭔가 사람들과 관여도가 달랐던 것 같다.

#두번째 변곡점

그런 나에게 두 번째 변곡점이 찾아왔다.

2층 계단에서 사뿐 사뿐 내려오던 그녀, 후광이 비쳤었다. 아내를 만난 것이다.

나는 아내를 거의 40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만났다. 아내와 나는 14살 차이가 난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 안 맞을 것 같지만 아내와 나는 찰떡 궁합이다. 아내는 내가 사상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 끌렸다고 했다.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끌림.

서로의 사상과 사고관, 관여도가 맞는 사람. 지금은 그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리고 몇 달 후면 둘 째가 찾아온다.

내가 과연 평화롭게 신혼을 시작했을까?

절대 그렇지 못했다.

아내가 나를 만났을 때 나는 돈도 집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나를 믿고 따라와준 아내가 고마울 따름이다. 어찌됐던 아무런 계획없이 제주도로 내려갔고 서귀포 범섬이 액자처럼 걸린 원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둘 다 너무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나는 변치 않는 생각이 하나 있다.

'인생은 새옹지마! 다 이유가 있겠지!'

나는 장애가 있다. 오른쪽 발바닥에 지방층이 없다. 아주 얇은 지방층이지만 이게 지구라는 엄청난 중력을 떠 받치고 있다. 우리를 걷고 뛰게 해줄 수 있는 받침대다. 그게 없어서 나는 신발이 없으면 제대로 걷지 못한다. 다행히도 말을 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멀쩡한? 장애다.

한 20년 전 발가락 다섯 개가 168개의 파편으로 산산히 부셔지는 사고를 당했었다. 수술 집도의도 내가 걸을 수 있게 될 거라는 장담을 못했다. 그러나 보란듯이 나는 일어섰고 신발을 신으면 누구도 눈치 못 채게 날쌔게? 돌아다닌다.

그때도 나는 생각 했다.

'다 이유가 있겠지. 이 모든 일이 전화위복일꺼야!'

내가 발 수술을 마치고 입원해 있을때, 매일 오전 10시가 제일 두려웠다.

'고작 2~3분의 소독시간'

생 살을 파헤치고 들어 온 소독솜이 드러난 뼈를 짐승의 송곳니처럼 할퀴고 지나갔다.

잠깐 사이지만 땀으로 흠뻑 젖은 병원복이 이를 악물고 참는 고통을 대변해주었다.

그렇게 매일 치료를 받으면서도

나는 매일 걸어나가는 상상을 했다.

내 염원이 통했을까?

어쩌면 살아나지 못할 거라던 신경이 살아 났고 점점 완치되어 병원을 걸어서 나왔다.

의사님이 말하길 기적이란다. 어쩌면 이게 자기암시의 힘이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인생을 살면서 무언가 변화가 필요할 때, 큰 사건 또는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그때마다 삶의 변화를 준 것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이후 나는 전에 하던 일과 완전 다른 일을 찾게됐고,

그런 변화가 지금 엠군님을 만난 초석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세번째 변곡점

다시 아내 랑 신혼으로 돌아가서,

하루 하루 빚에 쫓기면서도 아옹다옹 살던 어느 날이었다.

"자기야~~ 빨리 와서 이것 좀 봐~~"

다급하게 부르는 아내 목소리를 따라 컴퓨터 앞으로 갔다.

그때 나는 아내가 가르키는 모니터 건너 편에서 그 분을 만났다.

엠군님.

그게 내 인생의 세번째 변곡점이다.

엠타트업 물길 글에서 큰 울림을 얻은 우리는 엠타트업 OT를 참석하게 되었다. 그리곤 아내가 9기로 먼저 시작을 했다.

그때 시차를 두고 동시에 엠군님 면접을 봤는데, 아내는 합격 나는 불합격.

엠군님은 친히 내 얼굴을 보고 부드러운 표정과 말투로 말씀 하셨다.

"같이 듣는 것 보다 따로 들으시는 게 좋을 거에요. 6번님은 다음에 하시는게 좋을 것 같네요."

엠군님은 약속을 지키셨다. 나를 10기로 받아 주셨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 '자유'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맞다. 가족특강 OT에 나오는 그 부부 주인공이 바로 나다.

엠타트업 시작 후 3년 차, 작년엔 고향으로 돌아가 호수와 잔디가 내려다 보이는 멋진 전원주택을 지었다. 거기서 아내랑 아이랑 두번째 신혼을 만끽하고 있다.

















그러나 방향 없는 '자유'는 너무 많은 댓가를 요구했다. 많이 낙오하고 있을 때 또 다른 변곡점 둘째가 찾아와 내 엉덩이를 뻥 걷어 찼다.

"아빠 정신차려!"

정말 바로 그때다!

아내가 나를 다시 불렀다.

"자기야 엠군님 18기 시작 하신데~"

처음에도 지금도 아내로부터 시작됐다.

며칠 전 수업에서 엠군님이 엠타트업 수강생 수익구조 그래프를 보여주셨다.

제일 많은 2~3천 수익을 유지하다 떨어지는 유형이 바로 나다. 결혼과 아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겠지만 3번째 수업을 듣고 생각이 달라졌다.

'하루'의 우선순위에 대한 통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파란만장했던 나의 인생.

가족 덕분에 일어설 수 있었고

다시 가족 덕분에 살아갈 이유를 얻게 됐다.

그리고

엠군님을 만나 사람답게 살게 됐다.

















요즘은 사랑하는 나의 아이가 잠들기 전 엄마한테 건넨 말로 동부리를 대신한다

"아빠 사랑해, 엄마 내가 크게 말했어. 서울까지 들리게"

4년이 흘렀다.

지금 10기 때는 알지 못했던 깨달음이 있다.

엠군님과 코치님 매니저님, 101명 동기님들과 한 약속도 있다.

미친척 하고 감히 m군님 수업시간에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만큼 간절했다.

그래서 나의 월 억 달성은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고,

그때 나는 엠군리스트에 나가 이야기 할 것이다.

"이게 다 엠군님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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